GoFly.tistory.com

 

사람들에게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내가 이 블로그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계기를 잊지 않기 위해 이 글을 남긴다. 사실 첫 미국 유학시절 가장 의미있던 나의 청춘 한가운데의 시간을 기록하지 못한데 있다. 본의 아니게 원치 않던(?) 제 2차 미국 유학을 준비하면서 그 한을 풀어보고자 한다. 내가 보유한 생각이나 정보들이 누군가에겐 도움이 되면 조금이나마 뜻 깊겠다는 의미도 살짝 보태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주 쓰던 일기의 공백이, 그리고 수많은 메모리들을 특별히 간직할 수 있었던 지난 과거 유학시절을 다시 들여다 볼수 없다는 것이 나를 너무 슬프게 했다. 고작해야 캘린더를 보고 그 때의 장면을 잠시 회상할 뿐이었다. 그나마 기억력이 조금 좋은 것은 참 감사한 일이다. 물론 무드셀라증후군이 더해져서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지긋지긋하고 정말 지옥 같았던 곳, 내가 늘 입에 달고 사는 닉네임 "애증의 나라", 미국!

5년 만에 그 곳을 또 제 발로 찾아가는 만행을 저지르는 중이다.

 

작년 여름, 엄마가 의자에서 발을 헛딛으시는 바람에 병원에 입원까지 하시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약 두달 간 집안일과 병원 심부름을 도맡으며 혼자서 생각할 시간이 많았더랬다. 코로나 덕(?)에 가족의 간병은 커녕 병실 출입조차 되지 않아 마음은 불편했지만 몸은 편하고 한가로웠기 때문에 그 계기로 내 미래를 다시한번 생각하고 나를 점검할 수 있었다.

 

평소 자기검열이 심한 나는 이대로 살다간 안될 것 같다는 위협감이 들었던 것 같다. 미국에서 억대 이상이 드는 학업에 투자하고 시간을 들여 어렵게 전문직이 되었건만, 해당 라이선스를 원하는 곳에서 써먹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스스로가 한심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코로나 기간엔 내 전문자격을 높이 사준 국가기관에서 약 2년 간 근무하며 약 6개의 자격증을 취득했고(물론, 내 전문성과 동떨어진 그러나 어떻게든 연관 지어보고 싶은) 또 관련 업무의 탑스쿨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나름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그 곳에서 만난 현직들을 보며 너무 부러웠고 또 한편으론 내가 라이선스 보유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고 황송했다.  

 

하지만 언젠가 다시 나의 루트로 돌아가자니 지금이 아니면 너무 늦어버려 영영 제자리로 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번이 마지막 일 것 같다는 생각이 엄습해오면서 22년 가을깨 부터 마음이 초초해지기 시작했다. 대학원 졸업은 아직 1년은 더 남아, 왜 1년 더 일찍 지원하지 않았는지, 빨리 서두르지 못한 내 자신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러다 미국 유학시절 홍콩친구는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여 연락하였더니, STEM에 해당하는 이공계열로 대학원을 오면 워크퍼밋이 3년까지 나와서 본인은 합법적 노동을 위해 다시 제 2의 유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하는 말.. "너 지금 한국에서 뭐해? 남들 다 와서 기회를 누리고 있는데? 한국 사람도 엄청 많아! 그리고 너 오면 인기 많아서 마음만 먹으면 운명의 상대도 만날 수 있을껄~?" 이라는 것이다. '음.. 나 미국까지 안가도 한국에서도 인기 많단다, 친구야.'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것보다 머리를 띵~하고 울리는 3년 OPT 소식에 침대에 누워 곧바로 대학원에 문의를 넣었던 것 같다.

 

나는 대학원을 가게 된다면 편입을 해야해서, 하루가 멀다하고 이것저것 질문 폭탄을 쏟아냈더니 학교에서는 나를 지금 당장이라도 갈 생각이 있는 포텐셜 학생으로 분류했는지 어플리케이션 waiver code와 질의응답 세션 스케줄링 캘린더를 보내왔다.  이것이 바로 지원을 포기하게 끔 만든 일등공신이기도 했는데.. 학교 측 왈, "넌 질문이 너무 많으니 이메일은 안된다. 전화통화나 화상채팅으로 입학관리처와 컨퍼런스세션을 하자."는 것이었다. 더불어 보내 온 지원 Requirements를 보아하니 영어성적을 비롯하여 이것저것 너무 준비할 것이 많았고, 대학부터 현재 다니고 있는 대학원까지 모든 성적과 증명서들을 국제공인 인증기관에 보내 공증을 받아야 하는 등 입시요강을 보기만 해도 질려 버렸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가장 가까운 학기를 도전하기엔 내가 해낼 수 없을 것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과거 나의 미국인 스승이 대학원 편입해서 다시 오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지만, 나는 이미 그런 계획을 가지고 트라이했던 흔적을 캡쳐해 보내며 너무 복잡하고 다음학기를 준비하기엔 이미 늦은것 같아서 지금 이런거 할 때가 아닌거 같다고 딱 잘라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 참 바보 같았다. 그게 22년 11월 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12월이 되었고 나는 미국 대학원은 잊은 채, 2학기 기말고사에서 올 A+을 맞기 위해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결국 올에이뿔을 받아냈다.) 그리고 골프에 미친자 엄동설한에 동료(라 부르지만 엄연한 현직 선배)들과 필드에 나갔고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골프 연습장도 다녔다. 내 22년 하반기는 골프를 빼면 설명이 안될 정도였다. 오죽하면 부모님이 기왕이면 이렇게 좋아하게 된 김에 프로선수를 준비하라고 했을까..(근데 지금은 정말 이게 꿈이 됨;;)

 

그렇게 기말고사가 마무리 되고 대학원 방학이 찾아왔고 현직 동료들의 스케줄이 점점 회복되는 것을 보고 위기감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미국으로 취업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회사도 그만 둔 상태였다.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말이다. 사실 취업이 확정되고 움직여야 하는 것이 맞지만 내 펄스널 루틴상 저지르고 수습하는 경우가 많아서 말보다 행동이 먼저 앞섰고 사실 현직에 있지도 않은 나를 고용해 줄 미국인은 당연히 없을 것이기에 무작정 미국을 쳐들어가기로 마음 먹었다. 그게 올 1월 초이다. 나는 어차피 1년 중 절반은 합법적으로 체류가 가능한 퍼머넌트 비자가 있기에 6개월 안에만 잡을 구하면 된다는 무대뽀 정신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6개월 티켓을 무작정 끊었다. (이게 나중엔 2개월로 바뀌는 마법이 이루어졌다.)

 

그 와중, 직장도 없고 학교도 방학한 한량이 된 나.. 플로리다에 사는 그 홍콩친구와 밤낮으로 iMessage를 주고 받으며 알게 된 사실. 대학원 입학에 필수로 제출해야 하는 영어점수인 토플 아이엘츠 지알이 등을 대체할 '코로나 특수' 영어시험이 있다는 것이다. 어릴 때 미국 유학을 꿈꾸며 토플 때문에 핍박 받았던 나.. 그걸 다시 하기 싫어서 어쩌면 복잡한 일이라 회피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듀오링고라는 생소한 이 시험은 집에서 혼자 치루고 결과가 무려 이틀이면 나온다는 것이 나를 다시 흔들었다. 그렇게 희망의 불씨가 지펴지던 1월 초.. 일단 미국에 가는 것은 항공 티케팅으로 확정이 난 상태였기에, 그렇담 영어성적은 보류하고 나머지 절차라도 빨리 컨펌해봐야겠다는 의지로 학교에 하루가 멀다하고 문의를 넣었다. 대학원 편입으로도 일반 입학생처럼 3년 OPT를 받을 수 있는지 그것이 관건이었기에, 학점 인정을 비롯하여 부가질문이 너무너무 많았다. 시차에 맞추어 이메일 보내기와 더불어 콜링세션을 통해 다음학기 입학을 밀어부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발등에 불떨어진 느낌을 입학관리처 담당자에게 까지 고스란히 전달했던 것 같다. 미국 행정이 엄청나게 느린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는데 나의 요청에는 거의 실시간으로 답변을 잘 주셨고 또 응해주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 감사하다.

 

그렇게 23년 1월 중순이 되었고 나는 갑자기 다음 학기에 진학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자신감이 생겨 그때부터 총력을 다해 모든 서류 준비에 돌입했다. 졸업한 학교와 재학중인 학교의 증명서도 국제공인기관에 보내면서 약 30만원 넘게 지원 서류 준비에 아낌없이 투자했다. 그리고 지금은 한국에 존재하지도 않는 유행병, 홍역볼거리풍진(MMR)에 대한 감염주사도 맞게 되었다. 어릴 때 2차까지 접종을 하였지만 예전 전산기록이 남아있질 않아, 이 나이에 또 맞게 되어 유감이다.(접종간격 때문에 그 2차는 오늘에서야 맞았다.) 시험을 보는 것도 아닌 고작 서류 준비하면서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다. 공인기관 및 학교에 서류별로 더블체크를 하느라 시차에 맞추어 거의 한달 간 밤을 샜기에 엄청 예민하기도 했다. 그렇게 2월 초, 모든 증명서 공증작업이 끝났고 공인영어성적을 제외한 나머지 입학 서류를 번갯불에 콩구워 먹듯 처리하였다. 불도저 같은 내 성미, 이럴 땐 칭찬해주고 싶다.

 

난 그렇게 90% 이상의 대학원 입학절차를 마치곤, 예정대로 2월 중순 미국으로 떠났다. 영어시험은 48시간이면 아무때나 결과를 받아볼 수 있을 것이라는 놀라운 배짱으로 안일함을 가지고 말이다. '명색이 미국 유학파 전문직인데' 라는 건방진 마음이 날 두달 간 힘들게 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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